역사문화연구회
   
             
 
 
 

(2005-10-10 14:32:48)
관리자
1)조선판 건국신화
제목 없음

조선사 길라잡이-다시보는 조선왕조실록

제 1장 조선 판 건국신화(?) -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 하시니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새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새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태조이성계상(문화재청 홈피)이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조선의 건국 신화(?)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1, 2장이다. 대다수의 국가와 민족은 그 기원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으며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들(고조선,부여,고구려,신라,가야,고려) 역시 그들만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신화는 보통 지배자의 신성성과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국가와 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 시대에 편찬되었으므로 유학적 합리주의 사관(史觀)에 따라 신화적 요소는 배제되었지만 그 목적은 신화와 다를 것이 없다. 이 글에서는 용비어천가의 모태인 『태조실록』「총서」의 내용을 통해서 조선이 거창한 건국 신화가 아닌 사화(史話)를 만든 이유와 그 사화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의 가문 시조는 이한(李翰)으로 태조는 그의 21대손이 된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그다지 유력한 가문이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이한의 5대손인 이긍휴 이후로는 벼슬을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무인정변(1170)의 주동자였던 이의방이 6대조인 이린의 형이었다. 이의방이 1174년에 살해되었으니 태조 가문의 영화는 5년도 가지 못하고 몰락한 것이다.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朝) 이안사(李安社)가 별 일 아닌 관기 문제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도망친 것만 보아도 그의 가문이 별 볼일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목조는 삼척을 거쳐 의주(宜州)로 이주, 의주 병마사가 되었는데, 몽고의 침공 때 몽고의 산길(散吉)에 1000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1254년(고종 41)에 알동(斡東: 경흥 부근)에 거주하였고 이듬해에 그는 원으로부터 천호(千戶)에 임명되고 다루가치를 겸하였다. 알동은 현재의 영흥인데, 용비어천가에서는 이를 주(周) 시조 고공단보가 기산에 자리한 것에 비유하여 왕업의 시초가 되었다고 하였다.

목조가 이주할 때마다 다수의 백성들이 그를 따라왔기 때문에 알동에 정착할 무렵에는 그 세가 상당히 커져 있었고,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도 그 세력을 이어받았다. 그 세력을 시기한 여진 천호들이 그를 습격하자 두만강을 건너 피신하였는데 이때 추격이 급박한데 강물이 얕아져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이를 고공단보가 핍박을 받아 기산으로 이주한 것에 비유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건국 사화를 주 신화에 비유함으로써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가 주에 못지않음을 과시하려 한 의도로 보인다. 익조는 1300년에 쌍성 지역의 이주민을 관할하는 다루가치가 되었는데 이후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주민들을 함흥 지역에 정착시켰다

도조(度祖) 이춘(李椿)에 대해서는 승려가 와서 선래라는 아명을 지어준 태몽과 흑룡과 싸우는 백룡을 구원하자 백룡이 자손의 복을 예언한 꿈이 있다. 이 중 후자는 고려 태조의 신화 중 그 조부인 작제건이 여우에게 시달리는 용왕을 구원해 준 것과 유사하다.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은 1355년에 공민왕을 알현하고 이후 쌍성 지역의 군민을 진무(賑撫)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1356년 쌍성 총관부 탈환전 때 고려에 내부하였다. 그 후 승진하여 1361년에는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고, 그해 사망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태조의 무용담이 시작된다. 태조는 1335년 영흥에서 태어났는데 영흥의 당시 명칭은 화령(和寧)이었다. 따라서 태조가 즉위 후 국호를 개정할 때 화령이란 명칭도 고려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태조의 경우 특별한 태몽이 없으나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다는 말은 절대 빠지지 않았다. 당시 매를 사냥하는 사람들이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뛰어나게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한 것이 그 예이다. 여기서 태조의 무용담 몇 가지를 들어보기로 한다.

젊은 시절 화살 1대로 까마귀 5마리를 쏘아 떨어뜨렸다.

목욕을 하고 쉬다가 뛰어나오는 담비 20마리를 모두 쏘아 죽였다.

사냥을 하다가 범이 달려들자 주먹으로 쳐 쓰러뜨리고 활로 쏴 죽였다.

해주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그들을 토벌하였는데 적의 왼쪽 눈만 쏘아 모두 명중시켰다.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높은 절벽을 단숨에 뛰어올라 적을 쳤다.


여기에 태조가 왕기(王氣)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조실록』 원년 7월 병신(丙申) 조에는 태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각종 예언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아래와 같다.


어떤 이가 지리산 동굴에서 얻었다며 이런 글을 바쳤다.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

고려의 서운관에 간직한 비기에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설이 있고, 또 ‘왕씨(王氏)가 멸망하고 이씨(李氏)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고려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숨겨지고 발포(發布)되지 않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또 조명(早明)이란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닫지 못했더니, 뒤에 국호를 조선이라 한 뒤에야 조명이 곧 조선(朝鮮)을 이른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왕이 잠저에 있을 때에 시중 이인임(李仁任)을 그 사제(私第)에 가서 보았는데, 나가고 난 뒤에 인임(仁任)이 다른 사람에게 일렀다.“국가가 장차는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돌아갈 것이다.”


물론 이런 예언들의 다수는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인임이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조가 고려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의심이 조정 내부에서 있었던 것 같다. 최영은 이인임의 이 말에 화를 냈지만 위화도 회군 후에 체포되어 귀양을 가면서 이인임의 말이 옳았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태조는 공민왕 시기부터 이미 무장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우왕 대에 왜구 토벌을 통해서 전국적인 명사가 될 수 있었고, 당시 고려의 정치에 실망한 신진 사대부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1388년(우왕 14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태조는 1392년 7월 17일 조선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즉위 다음날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는 기사를 끝으로 조선의 개국 사화(史話)는 끝난다.

이처럼 조선 왕조가 태조의 선대와 업적을 상당히 장황하게 기술한 이유는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왕권을 차지한 것을 정당화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종은 이 건국 사화를 보다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살을 붙이고, 더 나아가 조상들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에 못지않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중국의 고사까지 첨부하여 대서서시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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